우리집 사계

바람을 바라보다

작곡가 지성호 2016. 6. 30. 16:48


   


 

우리 집 2층 너른 창밖은 온통 녹색으로 질펀하다.

맑은 날 오후가 되면 대체로 산에서 바람이 찾아와 억새밭을 횡행한다.

모악산 서쪽사면에 자리한 우리 동네의 특성상 해거름이면 가장 먼저 그늘이 지기 때문에 산록의 냉각된 바람이 아래로 불면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뿌리를 땅에 내린 억새는 대책 없이 바람이 하자는 대로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리며 부대낀다.



베르디의 오페라 가운데 한 인간의 처절한 비극을 그린 <리골레토>라는 오페라가 있다

 이 오페라에서 대중에게 잘 알려진 아리아 중 하나는 만토바 공작의 칸초네 여자의 마음(La donna è mobile)이다

 

바람에 날리는 갈대와 같이

항상 변하는 여자의 마음

La donna è mobile

Qual piuma al vento,

 

내 고등학교 시절 음악시간에 이 노래를 배울 때,  박수를 치고 목에 파란 핏줄을 돋우며 열정적으로 고래고래 노래하는 친구들이 있었다. 이들이 좋아하는 이유가 그 음악성보다는 여자들의 마음이 갈대와 같이 항상 변한다는 가사 때문이었다. 우리 때는 이성교재가 최고의 관심사이면서도 최고의 나쁜 짓으로 단속되던 시절이었다. 금지된 사랑에 대한 왜곡된 관심이 그런 식으로 표출됐을 것이다.

그러나 원 가사 piuma갈대가 아니라 깃털이다.

그러니까 여자의 마음은 바람에 날리는 깃털과 같이 항상 변하는...’이 맞다.

그런데 왜 깃털이 갈대로 변했을까?

우리나라 사람들의 심성에는 변덕이 심한 여자의 마음을 곧잘 갈대에 비유하는 버릇이 있다.

들녘에 지천으로 널브러져 흔들리는 갈대밭은 익숙한 시골풍경이니까.

그러니 여자의 마음을 바람에 날리는 깃털에 비유할 사람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갈대가 아니라 억새이다.

아는 사람은 다 알겠지만 갈대는 수로 변, 강가 등 습지에 무리를 이루어 사는데 비해 억새는 산이나 비탈 같은 척박한 곳에 산다. 생김새도 키가 껑충한 것 빼고는 좀 다른 모습이다. 가을에 들판을 하얗게 덮은 채 흔들리는 것은 다 억새이다.

갈대를 보고 자란 사람보다 억새를 보고 자란 사람이 대 다수다.

그러니 갈대는 곧 억새를 이른 말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겠다

 

어떻든 억새(갈대)는 바람이 불면 먼저 수런거리고 이내 흔들리기 시작한다.

이것이 억새의 생존방식이다.

왜냐고요

흔들리지 않고 맞서면 부러지니까.

억새의 뿌리를 캐내려면 삽조차 잘 먹지 않을 정도로 단단하고 촘촘하게 얽혀있다.

대지에 단단히 뿌리박은 억새는 갈 곳이 없다.

그저 바람 부는 대로 흔들릴 뿐이다.

그렇게 흔들리다가 바람이 멎으면 이내 복원력을 회복한다.


오늘같이 산바람 칠 때 나는 2충에 올라 너른 통창을 통해 억새들의 춤사위에 넋을 빼앗긴다.

골을 타고 내려오며 세를 형성한 바람이 촘촘하게 얼크러진 억새밭을 들쑤시면 한바탕 소동이 일어난다.

바람의 갈래가 서로 맞부딪쳐 뒤엉키면 억새들은 간지럼 타는 소년처럼 깔깔거리며 온몸을 자지러지듯 흔들어 댄다

습기가 빠진 오후의 황금빛 햇살이 팔랑거리는 억새 잎새에서 유리파편처럼 반짝거린다.

얼마나 아늑하고 그리운 풍경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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