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는 폭우가 쏟아지더니 오후 들어 거짓말같이 비가 갰다.
이런 날들이 벌서 며칠째 인지 모르겠다.
연못가 배롱나무가 붉은 꽃그늘을 드리웠다.
이 꽃이 피고 지고 백일동안 지속된다.
꽃이 완전히 질 때야 비로소 벼가 영그는 가을이 온다.
이 때문에 우리 어렸을 적 배고픈 시절에 배롱 꽃이 피는 동안에는 남의 집 출입을 삼가라고 어른들이 일렀었다.
피차 애면글면한 속사정을 잘 알기 때문이다.
배롱나무 줄기는 이맘때쯤이면 표피가 터지며 벗겨진다.
그만큼 줄기가 굵어진 것이다.
이 갈라터진 모습이 보기 싫어 손으로 벗겨줄라치면 매끈하고 하얀 새살을 보여준다.
여인의 감춰진 속살을 보는듯하다.
이 때문에 근엄한 반가에서는 배롱나무 심기를 꺼려했단다.
이 말에 근거를 더하는 것이 나무줄기를 손으로 문지르면 여인의 간지럼 타는 모습처럼 잎들이 흔들린다.
배롱나무를 ‘간지럼나무’라고도 하는 이유가 되겠다.
미역 가닥처럼 갈라터진 표피를 벗겨주다 보니 돌담에 눈길이 간다.
물 머금은 이끼가 돌담을 두텁게 감싸 안고 번져간다.
그 위로는 실한 돌나물이 촘촘하게 세력을 뻗어가고 있다.
내 몸뚱어리처럼 낡고 오래된 집의 돌담풍경이다.
그러고 보니 모악산 자락에 둥지를 틀어 산지도 벌써 28년째이다.
손가락 굵기의 나무들도 어느 덧 장성하여 울울한 메숲을 이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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